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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휴전지연..'제제 완화' 조건 요구해

우크라이나는 이번 휴전 합의가 흑해 전투의 즉각적인 중단을 의미한다고 판단했지만, 러시아는 경제 제재 해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입장을 달리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명확한 휴전 시점을 밝히지 않은 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살상을 멈춰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반복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가 협상을 지연시키면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련의 소규모 휴전 합의를 추진하며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지속적인 양보를 얻어내는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평화 중재자로 인정받는 이점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 러시아는 자국 국영 농업은행인 로셀호즈방크(Rosselkhozbank)에 대한 경제 제재가 해제되지 않으면 흑해 휴전안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에 미국이 동의하고, 유럽 동맹국들까지 이에 협조한다면 이번 협상은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에 훨씬 더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이 중재한 또 다른 부분 휴전 합의도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근 미국은 러시아의 에너지 시설을 30일 동안 공격하지 않는 조건의 휴전안을 도출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 시설을 타격하며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을 뒤집는 조치였다. 더욱이 해당 합의에는 강제 이행 수단이 포함되지 않아 발효 이후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공격을 계속하며 비난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달 초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제안한 30일 휴전안을 거부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징병 및 군사 훈련, 무기 수입 중단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는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 전 고위 당국자인 다니엘 프리드는 “러시아가 명백히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의 전형적인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러시아가 일부러 협상을 지연하는 것 같다”고 언급하며, 협상 지연이 의도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번 흑해 휴전안은 2022년 유엔이 중재했던 합의를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제안됐다. 당시 유엔이 주도한 합의는 우크라이나가 특정 항로를 통해 곡물을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러시아가 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러시아가 이를 악용해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자체적인 군사 작전을 통해 러시아 해군을 흑해 서부에서 몰아내고 수출 항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전쟁 전 수준으로 곡물 수출을 회복했으며, 유엔 합의가 시행됐던 시기보다 더 많은 곡물을 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제시한 흑해 휴전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프리드 전 국무부 당국자는 “러시아가 최소한 오데사 항구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시설에 대한 공격 중단을 약속해야만 균형 잡힌 휴전 합의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 백악관이 25일 발표한 내용에는 이러한 러시아의 공격 중단 보장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프리드는 “러시아는 협상을 통해 경제 제재 해제를 협상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며, 이번 협상이 러시아의 전략적 우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러시아의 제재 해제 요구에 대해 유럽연합(EU) 지도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평화를 원하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지금까지 구체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6일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힘을 통한 평화’가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검증한 후에야 러시아 제재 해제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시 26일 러시아가 흑해 휴전 합의에서 내건 조건들은 미국을 속여 양보를 받아내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요구하는 로셀호즈방크의 국제 결제 시스템(SWIFT) 복귀는 유럽 국가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사안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내에서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한 만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러시아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재 해제 요구가 관철될지는 미지수다. 다만 현재까지의 협상 과정은 러시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지속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